신은 존재하지 않았다

 

 

※주의※

 

- 등장인물 사망 소재

- 트리거 워닝 : 자해, 살인, 가스라이팅, 인종차별, 학대, 납치, 감금



 

 

 

 


 

사박―.

한걸음 내딛는 발걸음을 따라 말라가는 풀잎들이 누렇게 바스러져 흩어진다. 계절의 변화가 없던 이곳에 푸른 나뭇잎들이 떨어져 내리고, 공기의 온도가 한 층 낮아졌음이 피부로 느껴졌다.

사박―.

백색의 국화 꽃잎 하나가 걷는 이의 흔들림에 버티지 못하고 톡 떨어져 내린다. 꽃잎은 제 색깔과 대비되게 검은 코트 자락을 스쳐 지나갔다. 나름 품 안에 안겼던 국화는 이제 힘없는 손가락에 간신히 들린 채 발걸음에 맞춰 흔들렸다. 신전이 만든 명예롭게 죽은 자들을 기리는 공동묘지, 그 사이를 남자는 가로질러 걸어갔다.


이곳의 정중앙, 다른 묘비들보다 좀 더 크고 문양이 조각되어 눈에 띄는 한 묘비 앞에 다다라서야 남자는 걸음을 멈추었다. 「세상을 위한 신의 종, 용사가 이곳에 잠드느니.」 몇 번째 보는 문장인지 모르지만,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용사는 죽어서도 사람들에게 용사로 기억되었다. 어릴 때부터 용사로 자랐으며, 용사라는 무거운 책임을 등에 진 그는 마지막까지 용사라는 이름을 놓지 않았다. 국화를 손에 든 남자는 묘비 앞에 떨어트리듯 국화를 놓으며 용사였던 자의 마지막 얼굴을 상기했다.


그녀의 얼굴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다만, 제가 떠날 때 혼자 남게 될 어떤 이를 가슴에 담았다. 남자는 그런 용사를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 용사, 인퀴지터는 바보 같고 불쌍한 사람이었다. 신전의 반강제 하에 자신이 걸어가게 될 길이 어떠한 길이 될지 알지도 못했으며, 맨발로 가시를 밟아 나아감을 알았을 때조차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노을처럼 붉던 짧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실려 너울거리며 흩날릴 정도로 자랐을 때쯤, 인퀴지터는 눈을 감았다. 다들 용사의 죽음을 슬퍼하였다. ‘용사’의 죽음을. 그 용사의 이름을 뒤집어썼던 사람은 추모하던 이들에게 중요한 요소는 아니었다.


남자는 용사의 장례식에 참가하지 않았다. 장례식이 끝나고 일주일 뒤에야 인퀴지터가 묻힌 곳을 찾아왔다. 묘비에 새겨진 저 문장을 보았을 때는 허탈하게 마른 웃음이 나왔었다. 그리고 그 아래, 문장처럼 음각으로 새겨진 인퀴지터의 본명이 눈에 들어왔고,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다소 어두워진 눈동자가 먼저 글자를 따라 읽어갔고, 그 뒤를 손가락이 한 획씩 쓰다듬듯 써 내려갔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묘지가 이리도 먹먹할 수가 없었다.


“너의 이름을 이렇게 알고 싶지는 않았는데.”


이왕이면 스스로가 말해주는 이름을 귀에 담고 싶었다.


“──.”


혀를 굴리고 입술을 움직여 발음해 본 이 이름이 처음 단어를 내뱉는 아기처럼 참 어색했다.


“어때, 다른 일행들은 만났어?”


남자와 인퀴지터만을 남겨두고 먼저 떠나갔던 이들이 아직 생생하게 기억 속에 남았다. 당연히 물음에 대한 답을 듣지는 못함에 남자는 그것이 아쉽다고 느꼈다.

결론적으로는 그들은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하는 것에 성공하였다. 세상을 구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일을 해낸 이들의 일화는 역사로 기록될 것이며,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올 것이다.


남자는 묘지에 처음 방문한 이후, 며칠에 한 번 길게는 몇 달에 한 번 짧은 시간 들렸다가 돌아갔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났는가에 대해서는 이제 시간이란 개념이 무의미해진 남자에게 중요하지 않았음에 알 수 없다. 그저 오랜 시간이 지났으리라 추측만이 존재했다.

남자는 이제 묘지를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이 도시에 너무 오래 지낸 바람에 긴 시간 동안 변하지 않는 남자를 의심할 수 있었다.

묘지 앞 국화 한 송이는 마지막 추모이자 작별을 고하는 매개체 역할이었다. 인제 와서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그들에게 옅은 미소 한 번 보내주지 못했단 점이었다. 인퀴지터를 마지막으로 떠나보내며 그들조차 보지 못한 남자의 미소는 앞으로 그 누구도 볼 수 없으리라.


이제 떠날 시간이었다. 남겨진 인간들은 말라가는 풀잎과 시려지는 밤공기를 느끼며 천천히 겨울을 맞이할 것이다. 공동묘지 옆 신전에서 신을 향해 기도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며 그에게 닿았으나, 남자는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무심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들의 기도는 어리석은 짓이었다.

남자는 이제 지쳐버렸으니까.

 

 

 

 

 

 

신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어지는 내용이 궁금하세요? 포스트를 구매하고 이어지는 내용을 감상해보세요.

  • 텍스트 85,108 공백 제외
7,000P